문화&예술

남한산성과 들라크루아, 그리고 톨스토이 소설: 저항 정신

시대作 2025. 3. 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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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과 들라크루아, 그리고 톨스토이 소설: 저항 정신

세 개의 콘텐츠를 관통하는 '저항의 감정'과 '침묵의 윤리'를 보다 깊게 들어가보자. 역사는 반복되는데, 민초의 비명을 외면하지 않는 예술의 목소리는 지금 이 시대의 권력과 책임을 다시 묻는다. 침묵과 감정, 그리고 존엄을 향한 이 긴 여정은 단지 과거가 아닌,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이다.

 

  • "부드럽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 겨울 산성에는 말이 없었다.
  • 말이 없다는 건,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일까.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 사진=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남한산성

(2017)은 조용한 절망으로 시작해, 더 깊은 침묵으로 끝난다.

청의 대군 앞에서 조선은 무너졌지만, 무너진 건 나라보다 먼저 ‘믿음’이었다.

가장 위에 있어야 할 사람이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을 외면할 때,
그 침묵은 눈처럼 쌓여,
사람들 마음속까지 얼어붙게 한다.

성 밖의 백성은 굶주렸고,
성 안의 신하는 외교와 명분 사이에서 나라를 갉아먹었다.
그리하여 끝내 무릎 꿇은 건 ‘왕’이었다.

무릎을 꿇되, 단 한 번도
자신이 지켜야 할 백성들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 장면이 낯설지 않다는 건,
우리 역시 그런 장면을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본다.

우리는 묻게 된다.
저 깃발은 ‘승리’의 상징이었을까,
아니면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라는 다짐이었을까.

총을 들고 선 여성의 발치에는
어린아이와 노동자, 시민이 쓰러져 있다.
그들은 전면에 있지 않지만,
그들이 없다면 자유는 절대 깃발처럼 펄럭이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전장의 소음 너머에서
한 인간의 내면에 들리는 가장 조용한 질문을 들려준다.
삶은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가.
사랑, 신념, 죽음, 시간…


그 모든 격류 속에서 피에르와 안드레이, 나타샤는
흔들리되 부서지지 않으려 한다.
전쟁이 강요한 삶 속에서,
그들은 고요히 ‘평화’를 꿈꾼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기념, 캔버스에 유채, 260 x 325cm, 루브르 박물관)

 


한겨울, 남한산성의 두터운 눈은 침묵을 닮아 있었다.
<남한산성>의 국왕은 말 대신 망설임을 반복했고
백성은 그 틈에서 스러졌다.
지도자는 책임지지 않았고
어쩌면 때로는, 독재보다도 잔혹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조선만의 것이 아니었다.

 

들라크루아의 화폭 속,
민중을 이끄는 여신은 그 고요를 찢고 나아가는 이미지였다.
깃발을 든 여인은 앞장서지만,
진짜 주인공은 발밑에 쓰러진 이름 없는 사람들이다.

전장에서 희생된 이들의 피는 물감처럼 번져
자유의 깃발을 들게 했고
그것은 혁명의 비명인 동시에

‘다시는 외면당하지 않겠다’라는 다짐이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속 피에르와 안드레이 역시
이런 비극적 세계를 통과하며 묻는다.
‘어떤 삶이 정당한가?’
‘권력은 누구의 편에 서 있어야 하는가?’

세 작품은 각기 다른 장르를 품으며,
모두 권력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의 존엄을 중심에 놓는다.
그리고 선택되지 않은 자들로 인해
반복되는 고통의 역사를 증언한다.

그리하여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이다.

지금, ‘비상계엄’의 정국이 마침표를 찍지 못한 상황에서,
책임지지 않는 권력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다수의 시민이 피로와 무기력 속에 침묵을 감내할 때,
우리는 다시 그 서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선택받지 않은 국왕, 깃발을 든 여신,
총성을 뚫고 사랑을 지켜낸 인간들.
이들은 각기 다른 얼굴이면서, 결국 한 문장을 향해 다가간다.

“백성을 저버린 권력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 문장은 단지 외침이 아니라, 사유의 결과여야 한다.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고요에서,
부드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나오는 성찰이어야 한다.

각각의 콘텐츠는 우리에게 폭력을 선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을 꿰뚫는 감정의 언어로,

더 늦기 전에 묻는다.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느냐고.

&lt;War and Peace&gt; by Leo Tolstoy. image by Liannadavis

 

청년들에게

저항은 플래카드가 아니라 스토리이고

선언이 아니라 대화다.

해시태그는 잠시의 유행이 아니라

긴 시간 침묵 당했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다르게 싸운다.
피로가 깃든 말 대신,
사유와 감정이 만나는 말들로,
하나의 댓글, 하나의 창작물, 하나의 선택으로
매일 조금씩 세계를 바꿔가고 있다.

 

들라크루아의 자유가 칼날처럼 예리했다면,
우리가 꿈꾸는 자유는
달빛처럼 잔잔하지만 분명한 것.
모든 이를 품을 수 있는 감정,
그리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질서.

그래서 혁명은
폭력이 아니라 성찰이 되어야 한다.
불붙는 언어가 아니라,
속으로 스며드는 질문이어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이 질문 하나면 충분하다.
역사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가장 단순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지금,
그 이야기를 새롭게 쓸 차례는
바로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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