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볼레로, 불멸의 선율. 모리스 라벨을 기억하기

시대作 2025. 5. 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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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 모리스 라벨을 기억하기

모리스 라벨의 명작 ‘볼레로’는 반복되는 선율 너머에서 기억과 예술의 본질을 묻는다.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은 그의 창작과 인간적 고뇌를 섬세하게 조명한다.

망각 속에 사라진 작곡가의 삶은, 오히려 예술의 불멸성을 드러낸다.

물결은 멈추지 않았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점층적으로 쌓여 오르던 볼레로의 선율은 결국, 그 자신조차 그 노래가 자신의 것이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사그라진다.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은 이 단순하면서도 치명적인 비극을 마치 만년의 파도처럼 묘사한다. 점점 무너지는 기억, 지워지는 이름, 침묵 속에서 잃어가는 정체성. 라벨이라는 한 인간의 종말을, 가장 화려한 음악의 반복을 통해 묘사하는 아이러니야말로 이 영화가 지닌 가장 깊은 울림이자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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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 포스터

라벨, 구조와 감성 사이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 흔히 드뷔시와 더불어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쌍두마차로 언급되지만, 그는 이 범주를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애썼다. 1875년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시부르에서 태어난 그는 스페인계 어머니와 스위스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다채로운 문화의 교차점에서 자라났다. 특히 스페인 음악 특유의 리듬과 정열은 그의 작품 전반에 선명하게 녹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그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지만, 보수적인 교수진과의 충돌로 로마 대상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 좌절은 도리어 그만의 음악적 언어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라벨의 음악은 철저히 계산되고 정제된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격정을 드러내기보다 억제된 정서를 기하학적으로 배열하는 방식, 바로 그것이 그만의 특유한 감각이었다. 고전주의적 형식미와 인상주의적 음색 실험, 나아가 모더니즘의 감수성까지 두루 끌어안은 그는, 명확한 화성과 차가운 열정 속에서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모리스 라벨 작품집
모리스 라벨 작품집

‘볼레로’의 탄생과 예술의 반역

1928, 파리가 광란의 시대를 살아가던 그때, 러시아 출신의 무용수 이다 루빈슈타인은 라벨에게 새로운 발레 음악을 의뢰한다. 라벨은 작업을 잇지 못하며 한동안 침묵했다. 영감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는다. 로마 대상 실패로 입은 내면의 균열, 1차 세계대전에서의 충격, 사랑하던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뮤즈였던 미시아 세르와의 긴장된 관계. 그는 이 모든 상흔을 직면하며, 마침내 볼레로를 쏟아 낸다.

 

이 곡은 단 하나의 테마, 단 하나의 리듬으로 구성되었지만, 조금씩 변주되는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극한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단순한 반복은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서의 해체, 의미의 침묵, 그리고 기억이라는 인간 본성의 미세한 균열을 음악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곡은 대중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정작 라벨 자신은 이 곡을 마뜩잖아했다. 그는 이 곡을 내가 만든 가장 무의미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 무의미야말로, 오히려 가장 치명적인 의미를 던지는 역설로 작용했다.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 for the Left Hand) 1931-11-27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 for the Left Hand) 193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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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과 이다 루빈슈타인의 갈등

영화는 이다 루빈슈타인과 라벨의 갈등을 주요한 서사 축으로 가져온다. 실제로도 이 둘 사이엔 긴장이 존재했다. 라벨은 볼레로를 지극히 기하학적이고 절제된 방식으로 작곡했으나, 루빈슈타인은 이를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안무로 재해석했다. 라벨은 자신의 음악이 안무 때문에 음탕하게 왜곡되었다라고 느꼈으며, 무대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이는 단지 예술관의 충돌이 아니었다. 이는 음악이 신체를 지배할 것인가, 혹은 신체가 음악을 휘감을 것인가라는 더 깊은 예술철학의 대립이었다.

 

영화는 이 갈등을 감정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의 예술적 차이와 미학적 불화 속에서 예술이 어떻게 전혀 다른 존재로 변형되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안무는 곡을 설명하려 들고, 음악은 그것을 초월하려 한다. 결국 볼레로는 하나의 예술이 아니라 충돌의 장이 되었고, 그 충돌은 곡을 더 강렬한 존재로 만들어냈다.

이다 루빈슈타인
이다 루빈슈타인

미시아 세르와의 모호한 그림자

라벨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복잡한 관계는 미시아 세르와의 것이었다. 그녀는 파리 예술계의 중심인물로, 수많은 예술가의 후원자이자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라벨 역시 그녀에게 깊은 애착을 가졌지만, 그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 애틋함에 가까운 복잡한 정조였다. 영화는 이 관계를 우정과 연애 사이의 긴장으로 그리며,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의 축적을 시적으로 포착한다.

 

손끝에 스치듯 다가오는 장면들, 두 사람 사이의 침묵, 택시에 두고 내린 장갑에 대한 집착, 음악만을 주고 싶어 하던 라벨에게 키스도 원하는 미시아. 그러나 어긋난 시선들 속에서 라벨은 단지 음악이 아닌 존재 전체로 그녀를 갈망했던 것처럼 보인다.

 

실제 역사에서도 라벨과 미시아는 오래도록 가까운 사이였지만, 어떤 구체적인 연애의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라벨은 평생 독신으로 살며, 타인과의 정서적 거리를 지키려 했다. 이 거리감은 그의 음악, 특히 후기에 들어서 더욱 절제되고 비인간적인 음색과 구조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볼레로의 반복 속에 스며 있는, 감정 없는 정열로 구현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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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 스틸컷. 미시아 세르와 모리스 라벨

망각의 종말과 예술의 유언

라벨의 생애 말기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1932, 교통사고 이후로 그는 점점 말을 잃어갔고, 기억이 사라졌다. 당시의 의학적 진단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현재로선 외상성 뇌손상과 함께 알츠하이머성 증상을 동반한 뇌질환으로 추정된다. 영화는 이 병의 직접적 원인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의 파편화, 감각의 무너짐, 그리고 언어의 소실을 통해 라벨의 해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종착점은, 바로 볼레로를 더 이상 알아듣지 못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단순한 병리적 퇴행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이,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는 절대 고독의 선언처럼 다가온다.

 

볼레로의 구조는 마치 기억을 잃어가는 인간의 뇌를 닮았다. 반복되는 멜로디는 동일하게 들리지만, 실상은 미묘하게 다르다. 악기가 바뀌고, 음색이 달라지고, 템포가 살짝 흔들린다. 그리고 마침내 폭발한다. 이는 망각의 흐름 속에서도 자신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발악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끝에 도달한 라벨은 더 이상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이 음악이 자신의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 반복은 무의식의 파동이기도 하다. 하나의 정체성이 점점 흐려지다가, 끝내 남지 않게 되는 구조. 그러나 음악은 살아남는다. 이 생존은 예술의 유언이다. 예술가는 사라져도, 그가 남긴 진동은 여전히 세계를 흔든다. 볼레로: 불멸의 선율은 이 점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생명은 꺼지지만, 선율은 살아남는다. 창작자는 침묵하지만, 작품은 계속 말한다.

라벨과 친구들
모리스 라벨과 친구들

마치며: 기억, 예술, 존재

볼레로(Boléro)1928년 작곡되었으며, 같은 해 1122일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되었다. C장조, 4분의 3박자다. 곡은 일정한 템포 속에서 점점 커지는 크레셴도 형식으로 진행되며, 반복되는 두 개의 멜로디와 일정한 스네어 드럼 리듬 위에 전체 오케스트라가 차례로 등장하는 구조다. 15분간 이어지는 이 단순한 반복의 미학은, 라벨 자신조차 형식도 발전도 없는 음악이라 말했을 정도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단순함이 불멸의 선율이 되었다.

 

라벨은 어느 인터뷰에서 공장의 반복적 기계음을 인상적으로 느꼈다고 언급했고, 이는 음악학자들에 의해 볼레로의 리듬 설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한다.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은 산업화 시대의 기계음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적 실험이었음을 보여준다. 공장 기계음에서 시작된 선율은 무대 위에서 인간의 감정과 결합하여 새로운 예술로 탄생했다. 이러한 교차점은 라벨의 독창성과 시대적 감각을 잘 보여주는 예시로, 영화는 이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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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레로> 초연 뒤 관객의 박수.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 스틸컷

 

라벨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음악을 끝내 정의하지 않았다. 그는 설명하지 않았고, 설명 대신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울림이었다. 영화는 이 침묵을 존중하며, 오히려 그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단지 라벨 개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모든 예술가가 마주해야 할 본질적인 질문이다.

 

나의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나의 예술을 끝까지 소유할 수 있는가?

 

볼레로: 불멸의 선율은 이 질문에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한다. 예술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해방되는 것이다. 기억에서 지워지고, 감각을 떠나고, 결국 모두의 것이 되는 순간, 비로소 예술은 불멸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라벨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의 호흡으로 태어난 선율은 지금도 무대 위를 거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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