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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자살설과 타살설 심층 분석

시대作 2025. 5. 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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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자살설과 타살설의 심층 분석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자살설은 그의 정신병력과 자해 경험, 육성 진술에 기초한다.

타살설은 총상의 비효율적 위치, 총기 소지 여부, 증언을 근거로 한다.

1. 자살설 – 고통의 정점에서 스스로 마감하다

1890년 7월 27빈센트 반 고흐는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밀밭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고이틀 후 사망했다그는 경찰에게 자신이 총을 쐈다라고 말했다이는 그 자신의 육성으로 남은 유일한 증언이며자살설을 지지하는 핵심적인 근거다당시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를 지니고 있었는데이 편지에는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며 계속 나아가야 한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이는 삶을 포기한 듯한 문장은 아니지만창작과 고통이 공존하는 상태임을 시사한다.

 

고흐는 생전 수 차례 정신적 불안정 상태를 겪었다. 1888아를에서 귀를 자해한 사건은 그의 심리 상태가 극단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그의 병력은 양극성 장애와 경계성 인격장애의 혼합적 증상으로 분석되며여기에 만성 알코올 중독과 영양실조가 더해져 자해적 경향을 강화했다의사 폴 가셰는 그에 대해 심한 우울 상태에 있으나예술에 대한 집중력이 오히려 강박에 가깝다라고 기록했다이처럼 고흐의 삶은 정신의 불균형과 예술의 강박 사이에서 줄타기를 계속한 생이었다.

 

그의 죽음 직전인 7월에도 고흐는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특히 나무 뿌리는 삶의 복잡성과 얽힌 내면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된다그림의 강박적 붓놀림은 불안의 발로이자삶에 대한 집착의 반영이다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창작의 집착은 삶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질주의 한 방식이었을 가능성도 있다자살이라는 결단은 예술적 도취와 무너지는 정신 사이의 균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당시 고흐가 사용한 총기 역시 마을 인근 여관에서 빌려 간 것으로 알려졌고이는 총을 소지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복부에 총상을 입은 채 자신이 걸어 여관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계획된 행위이자 감정의 냉정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흐의 자살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죽음의 방식마저도 예술가다운 선택이었다라고 평가한다그는 슬픔을 화폭에 던진 화가였고죽음 또한 고요한 붓질의 연장선이었다는 해석이다.

🗞 The official postion of the Van Gogh Museum in Amsterdam
<까마귀가 나는 밀밭(Wheatfield with Crows, 1890년 7월, 50.5 x 103cm)>
<까마귀가 나는 밀밭(Wheatfield with Crows, 1890년 7월, 50.5 x 103cm)>
이 작품은 고흐가 사망하기 수일 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살설을 지지하는 이들이 그림을 그의 유서 없는 유언으로 간주하는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밀밭은 그가 실제로 총을 쐈다고 전해지는 장소이며, 그림에 담긴 상징과 심리적 암시는 절망의 절정과 창작의 한계, 죽음을 향한 내면적 향유를 엿볼 수 있게 한다.

2. 타살설 – 우연한 비극 혹은 은폐된 진실

2011, 전기 작가 스티븐 나이페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는 반 고흐: 그의 삶과 예술이라는 저작을 통해 충격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고흐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16세 소년 르네 세크레탕이 쏜 총이었고, 이는 의도하지 않은 타살이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여러 증거와 논리적 비약을 포함하고 있지만, 당시 사건을 재해석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점은, 고흐가 사용한 총기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여관에서 빌려 간 것이 아니라면, 그는 총을 소지할 이유가 없다.

 

총상이 복부, 즉 하복부 옆구리 아래로 치우친 위치에 있다는 점도 중요한 근거. 일반적인 자살의 경우 머리, 가슴, 혹은 입안이 주된 부위인데, 하복부는 극도로 비효율적인 선택이다. 고흐는 죽기까지 무려 30시간 이상 고통 속에 살아 있었고, 이는 비자발적인 총상일 가능성을 높인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자기 죽음에 대해 괜찮다, 그렇게 하려고 한 거다라고만 말했을 뿐, 범인을 지목하지 않았다. 이 점이 오히려 타살설을 강화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는 범인을 보호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크레탕 형제는 당시 고흐 주변에서 총을 쏘고 놀던 아이들이었고, 이웃 사람들은 종종 이들이 고흐를 조롱하거나 장난을 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특히 르네는 가짜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총을 차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흐는 원래 어린이와 청년들에게 관대했으며, 그들에게 분노하거나 고발할 가능성은 작았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아이들의 장난에 의한 실수가 밝혀진다면 그들이 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고흐는 침묵으로 사망의 책임을 홀로 떠안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게다가 그가 나는 그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편지는 창작 의지의 발로였다기보다, 아직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정황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자살을 계획하고 있지 않았다는 근거로 기능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살 유서가 없다. 그의 편지들은 그 자체로 문학적 유산이지만, 자살 직전의 내면을 드러내는 극적인 단서는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경찰이 이 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점은 타살 가능성이 무시되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 국제법의학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Forensic Scineces) 타살설 제기

 

&lt;Loving Vincent&gt;(2017) Selected Film Stills
<Loving Vincent>(2017) Selected Film Stills

 

영화 〈러빙 빈센트〉는 죽음을 해명하려는 영화이지만, 동시에 그의 삶을 새롭게 증명하는 회화적 헌사다. 영화는 명확히 결론을 내리진 않지만, 관객을 타살의 가능성으로 점점 끌어들인다. 타살설은 영화의 서사를 견인하는 동력이며, 이를 통해 관객은 고흐를 하나의 비극적 수수께끼이자 영원한 화가로 재인식하게 된다.

3. 상호 반박과 판단

자살설은 고흐의 정신 병력과 자해의 역사, 그리고 그의 육성 진술이라는 강력한 증거를 기반으로 한다. 자살에 대한 유일한 물증은 바로 내가 그랬다라는 말뿐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고흐가 범인을 보호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총기의 소유 문제, 총상 위치, 그리고 비효율적인 자살 방식은 자살설의 주요 약점이다. 또한 그는 사망 직전까지도 창작에 몰두했고, 식사와 야외 스케치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타살설은 이와 반대로 정황증거와 후대의 재구성에 의존하는 정도다. 하지만 총상이 비효율적인 위치에 있었고, 총기를 숨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며, 사망 직전 그의 생활이 안정되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논거다. 타살설은 특히 당시 고흐 주변의 청소년들과의 관계, 총의 접근 가능성, 고흐의 성격 등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충분하다. 다만 이는 추론적이며, 결정적인 물적 증거나 제삼자의 진술은 부족하다.

 

진실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자살설은 고흐의 정신적 불안정성과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 타살설은 총상의 물리적 조건과 정황증거를 바탕으로, 예술가가 타인의 실수를 감싸안고 죽음을 택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둘 중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논쟁은 예술가의 죽음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통, 책임, 창작의 본질에 다가가는 또 하나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진상보다 중요한 것은, 고흐가 고통 속에서도 예술을 통해 무엇을 남겼느냐일 것이다.

 

그의 동생 테오는 고흐의 삶 전체를 지탱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서신은 문학과 심리학의 보고이자, 예술가의 정신적 지주에 대한 인간적 기록이다. 죽기 이틀 전 테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는 끝맺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문장은 끝맺지 못했기에 오히려 생생히 살아 있다. “나는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해.” 이 말은 고흐가 죽음을 향해 달려간 것이 아니라, 삶의 경계선 위를 부단히 걷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그는 아직, 그릴 것이 있었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년 1월, 60 x 49cm)〉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년 1월, 60 x 4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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