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양심> 서평: 최재천의 윤리 진화론

시대作 2025. 4. 1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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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서평: 최재천의 윤리 진화론

 

<양심>은 진화생물학자 최재천이 과학자의 시선으로 되살린 윤리적 감각의 복권 선언이다.

개인적 고백과 사회적 실천이 엮인 서사는, 양심이 감정이 아닌 '행동의 조건'임을 드러낸다.

책 곳곳에 담긴 사례는 우리가 도태시킨 감각이 왜 지금 시대에 다시 필요해졌는지를 웅변한다.

 

📌 목차


양심이라는 말의 부활, 그리고 시대의 불편함

한때 우리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던 말, ‘양심’은 어느 순간부터 농담처럼 소비되다 사라졌다. “양심에 털 났냐”라는 말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기보다 웃음의 코드로 기능했고, ‘양심’을 화두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재천 교수의 책 <양심>은 언어의 퇴락을 되짚는 동시에, 그 사라진 언어가 왜 지금 다시 불려 나와야 하는지를 성찰적으로 묻는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내 안의 깨끗한 무엇, 바로 양심이다.”

 

 

양심은 내면의 작고 불편한 진동이지만, 그 불편함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거짓을 말하게 된다. 이 책은 윤리 교본이기보다는, 오히려 진화생물학자의 언어를 집약한 것이다. 그러면서 과학적 관찰과 사회적 통찰이 겹치는 지점에서 양심이라는 개념을 복원해 내는 시도다. 특히 ‘방송에서는 더 담지 못했던 양심편, 그 못다 한 이야기’(p.026)에서는 유튜브 채널 제작팀과 함께 정리한 미공개 사례들을 통해, 양심이라는 개념의 다층성과 감각적 현실감을 덧붙인다.

 

우리 시대가 양심을 도태시킨 이유는 ‘도움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착각을 깨뜨리기 위해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윤리를 교차시키며, 우리가 얼마나 본래의 감각에서 멀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최재천 &lt;양심&gt;

 

 

과학자, 그러나 실천가: 행동으로서의 양심

최재천 교수가 말하는 양심은 이론이나 추상적 미덕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의 결정적 순간마다 ‘행동으로 불거진 내면의 윤리’다. 그는 자신을 ‘비겁한 사람’이라 고백하면서도, 동강댐 반대, 4대강 사업 비판, 제돌이 방류, 호주제 폐지 등 굵직한 사회적 이슈에 앞장서 왔다. 그 모든 행동의 배경에는 단 하나, ‘얼어 죽을 양심’이 있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양심>의 실천적 무게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차마… 어차피… 차라리'(p.10)라는 세 단어를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차마 외면할 수 없고, 어차피 불편할 것이며, 차라리 나서지 않으면 스스로 견딜 수 없다는, 그 감정의 역학은 가벼운 양심의 발화가 아니라 윤리의 실행 조건이 된다.

 

벨라의 방류를 요구하며 기업의 무책임을 지적한 ‘벨라의 자유를 찾아주세요’(p.92) 에피소드도 그러한 행동의 연장이다. ‘양심은 불편함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라는 그의 말은, 양심을 말하기보다 살아내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양심은 본능인가, 학습인가: 생물학과 진화의 시선

양심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최재천 교수는 실험실의 흰쥐에서부터 파나마 정글의 흡혈박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들의 공감과 나눔 행동을 관찰한 사례를 제시한다. 친구 쥐가 배고파하자 식음을 전폐한 흰쥐, 굶주린 동료에게 피를 게워주는 흡혈박쥐의 모습은 단순한 본능의 발현으로 보이지 않는다.

 

“공감력과 양심은 포유류의 심성이다. 다만 우리는 그 본성을 무뎌지도록 학습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은, 양심이 후천적으로 덧씌워진 관념이 아니라 진화의 결과라는 점이다. ‘과학자들의 절박한 외침’(p.118)에서는 실험실을 떠나 거리로 나선 이들이 바로 그 불편함을 감지한 과학자들이었음을 보여준다. 뇌과학자 패트리샤 처칠랜드의 이론처럼, 양심은 특정한 뇌 구조에서 비롯된 감각이며, 인간은 이 감각을 키우거나 죽일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공정과 공평의 차이, 이 사이에 놓인 양심

<양심>에서 가장 명징하게 떠오르는 사회적 제언은 “양심이 공평을 공정으로 바꾼다”라는 말이다. 그는 서울대 졸업식 축사(p.32)에서 이렇게 말한다. “키가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의자를 나눠주는 것이 공평일 수는 있어도, 공정하지는 않다. 작은 이에게 더 높은 의자를 주어야 비로소 공정이다.”

 

이 말은 곧 법치와 정의의 차이, 획일과 배려의 간극을 짚는 통찰이 된다. 현대 한국 사회는 공정이라는 말에 집착해 왔다. 그러나 그 공정은 종종 획일성과 동일함으로 환원되었고 불평등의 구조는 정당화되었다. 최 교수는 이러한 구조에 양심을 개입시켜, 진정한 공정은 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편함을 감지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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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사랑 사이: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표현한다

<양심>에는 최재천 교수의 또 다른 좌우명이 등장한다. 알면 사랑한다. 사랑하면 표현하게 된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과학적 소통의 이상이 아니라, 지식인의 자기 윤리를 함축하는 문장이다. 그는 과학자로서 대중 강연과 저술,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을 통해 꾸준히 알림의 윤리를 실천해 왔다.

 

그가 전갈에 대한 혐오를 사랑으로 바꾸는 이야기, 동물원에서 해방된 제돌이의 삶을 지속해서 추적하는 태도는 단지 정보의 나열이 아닌 공감의 확장이다. ‘제돌이와 친구들을 고향 제주 바다로 돌려보낸 역사적 순간’(p.62)은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인간과 자연 사이에 놓인 윤리의 단면을 상기시킨다. 지식은 때때로 계몽적 권위가 되지만, 최 교수의 방식은 사랑의 매개로서 지식을 다룬다. 이는 곧 양심의 표현이자, 지식의 책임이다.

 

무뎌진 사회를 깨우는 마지막 불씨, 양심

<양심>은 한 사회가 무엇을 기준 삼아 움직여야 하는가에 대한 묵직한 제안이다. 양심은 수시로 부딪히는 내면의 불편함이 아니라, 공동체를 움직이는 불씨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세상이 건강한 사회라는 그의 말은 풍자가 아니라 진단이다. 법을 피하는 데 능숙한 이들이 아니라, 법 이전의 불편함을 감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사회는 회복된다.

 

그는 호주제 폐지 운동에 나섰고, <양심>의 마지막 장인 누구에겐 뺏기는 무엇이지만, 누군가에겐 삶의 굴레였다(p.164)에서 그 실천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부계 혈통 중심의 제도는 생물학적으로도 부자연스럽다고 그는 설명하며, 결국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을 끌어내는 데 학자의 양심이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 교수는 말한다. “나는 숙론의 장을 만들고 싶다.” 그가 말하는 숙론은 결론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예의를 지키며 토론할 수 있는 장, 그것이야말로 양심이 발현되는 공론장이다. 지금 시점에, 대한민국 정치와 사회는 무엇보다 이 작은 불편함의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양심>은 이렇게 출발하는 변화의 서문이다.

 

📉 최재천의 "공정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튜브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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