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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총성, 외교관 사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

시대作 2025. 5. 2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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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총성, 외교관 사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 국제사회가 키운 역사

미국 워싱턴 D.C.에서 발생한 이스라엘 외교관 피격 사건, 테러가 아니라 국제사회가 부른 구조적 비극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은 국경을 넘어 인류의 윤리와 정의를 시험하는 과제로 떠올랐다.
국제사회는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되며, 이번 총격은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윤리적 물음이다.

총성은 어디서 왔는가: 밤하늘을 찢은 울분의 외침

미국 워싱턴 D.C.의 밤하늘을 찢은 총성. 두 젊은 외교관은 아직 펼쳐보지 못한 약혼의 미래를 품고 차가운 보도 위에 쓰러졌다. 그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현장을 가른 것은 한 남자의 외침이었다.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라.” 이는 분노로 질주한 개인의 외침이었으되, 동시에 압축된 역사의 고통이 대륙을 넘어 터진 울분의 파열음이었다.

 

이 비극의 뿌리는 1948, 나크바(Nakba)로 회자되는 팔레스타인의 대재앙에서 비롯된다. 이스라엘의 건국이 유대인에게는 독립의 선포였지만,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추방과 유랑, 침묵 속에서 묻힌 정체성의 붕괴였다. 국경을 둘러싼 피의 공방과 민족 간의 절망이 몇 세대에 걸쳐 중첩되며,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는 국제사회 구석구석으로 흩어졌고, 동시에 그 비극은 반복된 참상 속에서 점차 잊히는 게 아닌지.

 

이번 워싱턴 총격 사건을 이스라엘과 미국은 즉각 반유대주의적 테러로 규정했다. 피해자들의 슬픔은 너무도 깊고, 공격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총성의 맥락을 광기나 악의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이 역사의 뒤편에 선 진실을 다시 외면하게 된다. 증오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분노는 왜, 그리고 어떻게 국경을 넘어왔는가?

2025 killing of Israeli Embassy in Washington, D.C. workers
2025 killing of Israeli Embassy in Washington, D.C. workers

 

역사란 반복된 침묵의 기록이다

20세기 초,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시온주의라는 형태로 응축되었고,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두 민족이 동일한 땅을 조국으로 규정할 때, 그것은 언젠가 피가 뿜어질 수밖에 없는 충돌을 예고하는 신화가 된다. 1948, 유엔의 분할 결의와 이스라엘의 독립은 팔레스타인인에게는 강제 추방, 뿌리 잃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탄생이었다. 유엔 결의, 협정, 평화안은 반복되었지만, ‘귀환’, ‘국경’, ‘예루살렘이라는 단어 앞에서 언제나 현실은 멈췄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과 인티파다, 하마스의 무장화, 이스라엘의 보복은 끊임없이 희생을 상호 확증하고, 앙갚음의 정당성을 강화해 왔다. 누가 먼저였는가는 이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수십 년간 누구도 멈추지 않았고, 누구도 경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남았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방관이며 조장이 되어 사태를 악화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두 민족 모두의 고통을 말하며 중립을 가장했을 때, 사실상 어느 한 편의 무게추는 명확히 기울고 있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유엔 결의안은 종이 위에서만 유효했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사소화하거나 무력화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역사적으로 이해되었으나 실천적으로 외면된 고통으로 자리 잡았고, 이 오래된 무관심이 오늘의 폭발적 분노를 기름처럼 부추겼다.

네덜란드 헤이그, 팔레스타인 침략 반대 시위
네덜란드 헤이그, 팔레스타인 침략 반대 시위

오늘, 가자에서 흘러나온 붉은 그림자

현재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기드온의 전차 작전을 펼치며 12주째 봉쇄와 공격을 지속하고 있다. 매일 수십에서 수백의 민간인이 희생되고, 병원은 붕괴하며, 식량은 차단되고 있다. 유엔은 이 구호 상황을 바다에 한 방울이라 표현했고, 가자지구는 이제 인류가 외면한 최대의 수용소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조차 반전 여론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전직 군 수뇌부와 예비군 수천 명이 우리는 아기를 죽이는 나라가 아니다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이스라엘 시민의 61%전쟁을 끝내고 인질을 돌려보내야 한다라고 응답하고 있다. 하지만 네타냐후 총리는 극우 내각의 요구에 기댄 정권 연장을 위해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전쟁은 정치가 되었고, 죽음은 정권의 도구가 되었다.

 

오늘의 가자는 더 이상 지도 위의 분쟁지구로 수용되지 않는다. 그곳은 인류 보편의 윤리가 시험받고, 국제법의 권위가 침묵하는 공간이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구호로 정당화된 폭격 속에서 무너지는 것은 단지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아이의 웃음과 노인의 기도, 병든 자의 마지막 숨결이다. 가자는 세계가 끝내 마주하지 않으려 한 집단적 죄책감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이 시대 인류 양심의 거울이자, 우리가 어느 지점까지 외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최후의 시험지이다.

Two Israeli embassy staff shot dead outside Jewish museum in Washington, DC
Two Israeli embassy staff shot dead outside Jewish museum in Washington, DC

외교도 조준된 총구 앞에서

이 전쟁은 이제 더 이상 단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지난 21,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초청으로 제닌 난민캠프를 방문한 25명의 외교관에게 이스라엘군은 경고 사격을 감행했다. 국제 감시와 인도적 접근마저 전쟁터의 위협 속에 휘말린 것이다. 영국과 캐나다, 유럽연합은 격렬히 항의했고, 이는 이스라엘의 외교적 고립이 심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은 이스라엘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중단했고, 유럽연합은 25년 된 협정을 재검토하고 있다. 프랑스와 캐나다, 독일, 네덜란드까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다음 달 열릴, 유엔 회의에서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방안까지 검토되고 있다. 이 흐름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징표다.

 

외교관들을 향한 경고 사격은 총탄보다 날카로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외교란 무력 앞에 무력하다는 사실, 다시금 냉소적으로 증명한 사건이다. 전쟁은 이제 국경을 넘어, 외교의 테이블 위에서도 무력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스라엘의 보안 논리는 점점 더 극단화되고 있으며, 그 안보란 오히려 진실의 접근을 막는 명분이 되고 있다. 외교마저 위협당하는 상황은, 국제사회가 이 전쟁을 더 이상 정치적 수사로만 다룰 수 없다는 명확한 경고이기도 하다.

'They were a beautiful couple': Israeli ambassador remembers embassy members killed in shooting
'They were a beautiful couple': Israeli ambassador remembers embassy members killed in shooting

미국, 중재자인가 공모자인가

수십 년간 미국은 중재자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해 왔다. 안보를 명분으로 한 군사 원조는 민간인 폭격으로 이어졌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신뢰도는 균열을 맞았다. 워싱턴에서 총을 든 용의자의 외침이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라였다는 사실은, 미국조차 이 갈등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는 단지 증오가 미국을 덮쳤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방관과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 총성은 미국과 서방에 던진 질문이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왜 계속 눈을 감았는가?’ 미국은 중재자의 탈을 쓰고 오랫동안 갈등의 한 축을 형성해 왔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편향이 아니라, 구조적 공모였다. 수십 년간 반복된 거부권 행사, 군사 원조, 외교적 비호는 미국이 이스라엘의 행동에 신뢰라는 이름의 보험을 제공해 온 것과 다름없다. 이제 그 결과는 자국 내에서 터진 총성으로 되돌아왔다. 총탄은 날아오되, 그 방향은 오랜 시간 방치된 정의의 부재를 겨냥했다. 그리고 그 경고는 미국이 여전히 외면한다면, 또 다른 형태로 반복될 것임을 예고한다.

가자지구, 19일 현장
가자지구, 19일 현장

총성이 남긴 것들

우리는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총성이 울린 도시는 왜 그 총성을 피하지 못했는가? 누가 방아쇠를 당겼는가보다, 누가 그 방아쇠가 만들어지도록 허락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팔레스타인의 참사는 결코 한쪽의 폭력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가자에서, 서안지구에서, 그리고 이제 워싱턴 한복판에서 터진 비극은 전 세계가 감당해야 할 윤리의 문제다. 그리고 이것은 누가 옳은지를 묻는 정치적 질문이 아니라, “누가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겼는지를 묻는 도덕의 문제이다.

 

국제사회는 오랫동안 중재자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손에는 종종 한쪽 편의 무기를 쥐고 있었다. 침묵은 무기가 되었고, 방관은 입을 다문 공범이 되었다. 이제는 외면이 더 이상 중립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세계는 점차 정의의 중심을 잃어가고 있다. 워싱턴의 총성은 이 윤리적 붕괴의 파열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비극은 '저기 멀리'에서 벌어지는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가자의 울음은 시리아의 폐허와도, 우크라이나의 폐허와도, 아프리카의 사막과도 맞닿아 있다. 이것은 지역 분쟁이 아닌 인류의 시험이며, 그 시험은 지금 우리의 광장에서, 언론의 헤드라인 너머에서,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2 killed in Capital Jewish Museum shooting by suspect who shouted ‘Free Palestine,’ police say
2 killed in Capital Jewish Museum shooting by suspect who shouted ‘Free Palestine,’ police say

세계 평화를 위한 노력은

오늘 워싱턴의 총성은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전하는 고발장이었다. 침묵과 외면으로 방조 된 비극이 어떻게 세계를 위협하는지, 그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주는 비극의 반향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물음 앞에 선다.

 

그 침묵의 대가를, 우리는 또 어디서 지급해야 하는가?”

 

이제 묻는다.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무엇인가? 총성이 멎은 뒤에도 남는 것이 오직 분노와 분열이라면, 그 평화는 환상에 불과하다. 진정한 평화란 침묵을 깨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증오를 견디는 인내와, 공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이 없다면, 총성은 계속해서 장소만을 바꾸어 반복될 것이다.

 

이 글은 하나의 고발이자 촉구인 셈이다. 우리는 더 이상 경계 밖에서 관망할 수 없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가자와 워싱턴 사이의 거리는 정치적 거리보다 윤리적 무관심이 만든 심연으로 벌어져 있다. 그 괴리를 좁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우리가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응답뿐이다.

시기 주요 사태 분쟁 성격 국제사회 개입
1917 밸푸어 선언
(영국, 유대인 국가 건설 지지)
제국주의적 배경 속 식민지 전략 영국의 일방적 선언, 아랍 세계 반발
1947–1948 UN 분할안 & 이스라엘 건국
(나크바: 팔레스타인인 대량 추방)
양 민족의 영토 충돌 UN 개입 (181호), 아랍-이스라엘 전쟁 발발
1967 6일 전쟁
(이스라엘, 가자·서안·동예루살렘·시나이·골란고원 점령)
군사 점령, 난민 문제 심화 UN 결의 242호 (점령지 철수 요구)
1987–1993 제1차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민중 저항 운동)
민중 저항 vs 군사 진압 오슬로 협정 중재 (미국, 노르웨이)
2000–2005 제2차 인티파다
(폭력적 충돌 격화, 자살 폭탄)
무력 충돌 본격화 로드맵 평화안 제안 (미국·EU·UN·러시아)
2006–현재 하마스 가자 장악 이후
가자 봉쇄, 하마스-이스라엘 반복 충돌
무장 정파 간 전면전, 인도주의 위기 UN 구호활동, 이집트·카타르 중재 시도
2023–2025 가자전쟁 & 국제 비판 고조
기드온 작전, 반유대주의·반전 시위 확산
전면전, 집단 처벌 논란 EU·영국 FTA 중단,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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