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교 60년, 성장과 기억의 교차로: 경제·역사·문화의 현재와 미래
1965년 한일수교는 산업화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동시에 기억의 봉인이기도 했다. 기술은 자립했지만, 윤리의 외교는 후퇴했다. 지금, 우리는 성장의 성과를 넘어, 기억과 정의의 지평을 다시 묻고 있다.
1. 성장의 그늘: 청구권 자금과 기억의 봉인
2. 기술로 자립한 국가, 윤리로 자립하지 못한 외교
3. 경제 추월, 그러나 구조적 병목은 여전하다
4. 외교의 실용성과 기억의 윤리학 사이에서
5. K-컬처의 확산, 문화는 기억을 가로지를 수 있을까
결론: ‘성장’이라는 해답을 넘어, ‘기억’이라는 질문으로
1. 성장의 그늘: 청구권 자금과 기억의 봉인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는 단순한 외교 복원이 아니라, 식민의 기억 위에서 이루어진 경제적 타협이었다. 일본은 ‘청구권 자금’이라는 이름으로 5억 달러 상당의 자금을 제공했고, 한국은 이를 기반으로 산업화의 토대를 닦았다. 이 자금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중화학공업과 같은 국가 성장의 동력으로 작동했지만, 그 기저에는 개인의 권리를 묵살한 구조적 침묵이 있었다.
청구권 협정은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이라는 문구로 역사적 책임의 문을 닫았고, 그 뒤편에서 강제징용·위안부 피해자들은 법적·도덕적 호소권을 박탈당한 채, 개인의 존엄 대신 집단의 번영을 위한 제물로 기능했다. 이는 이후 수십 년간 ‘성장만이 정의’라는 시대적 신념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그 결과,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일본을 빠르게 추격하고 결국 2023년 1인당 GNI에서 추월하게 되지만, 과거의 역사적 정의를 회복하는 데는 실패한 채 ‘불완전한 화해’만이 반복되는 외교적 지형을 만들었다. 이처럼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봉인된 기억은, 언젠가 그 자체로 갈등의 불씨로 되살아난다.
한일수교 60년은 단지 ‘수교’의 시간이 아니라, 정의가 유예된 세월의 지층이기도 하다. 이 오래된 유예는 한국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지연된 진실에 눈을 감을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2. 기술로 자립한 국가, 윤리로 자립하지 못한 외교
2019년 일본이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해 반도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를 단행하면서, 한국과 일본은 다시 한번 경제를 둘러싼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당시 일본은 “국제 신뢰 훼손”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판결을 경제 보복으로 되갚으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한국에게 새로운 전기를 제공했다.
이 위기를 계기로 한국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자립에 나섰고, 국산화 비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면서 일본 의존도를 낮추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탈일본’이라는 전략적 방향을 뚜렷하게 설정하게 한 전환점이었으며, 기술 주권의 중요성을 국가적 담론으로 부각시킨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후 ‘화해’의 방식이다. 윤석열 정부는 2023년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명분 아래, 피해자 동의 없이 강제징용 배상안을 제3자 변제 방식으로 일방 처리했다. 이는 법적 판결을 무력화하는 것이자, 기억 없는 실용주의 외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기술로 자립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윤리적 자립성-즉, 피해자의 목소리를 국가적 외교에서 존중하는 태도-에서는 오히려 후퇴했다. 이러한 비대칭은 한국이 외형적으로는 ‘경쟁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추격자’의 위치에 머물고 있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3. 경제 추월, 그러나 구조적 병목은 여전하다
2023년 한국의 1인당 GNI는 일본을 추월했다. 이 상징적 사건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추격자’ 한국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그러나 숫자 자체의 성취는 경제 구조 전반의 건전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일본은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을 겪으며, 성장률 저하와 인구 감소, 자산 거품 붕괴라는 복합적 위기를 겪었다. 한국은 현재 그들과 닮은 길을 걷고 있다. 민간 부채 비율이 200%를 넘어서며 일본 버블기 수준에 근접했고, 생산가능인구는 이미 감소 국면에 접어들었다.
또한 한국의 소득 역전은 소비자 체감과 괴리가 크다. 자산 양극화, 청년 실업, 부동산 불균형 등은 소득 증가의 이면을 갉아먹고 있으며, 서비스산업의 저생산성과 중간 기업군의 취약성은 성장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단순한 수치상의 추월은 거울의 환영에 가깝다. 진정한 경쟁자가 되기 위해서는 산업 구조 재편, 인구 정책 혁신, 사회안전망 강화 같은 체질적 변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일본보다 빠른 속도로 망가지는 일본’이 될 위험도 안고 있다.
4. 외교의 실용성과 기억의 윤리학 사이에서
2023년 이후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에서 실익 중심 외교를 표방하며 관계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8년 만의 통화스와프 체결, 고위 경제협의회 재개, 화이트리스트 복귀 등은 겉으로 보기엔 신뢰 회복의 징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는 과거사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한 뒤가 아니라, 그 위에 덮은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크다.
과거를 '이해하고 넘어간다'는 것과 '무시한 채 넘어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자는 책임과 공감의 과정을 포함하지만, 후자는 책임의 포기를 전제로 한다. 윤 정부의 외교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는 인상이 짙다. 이는 결국 국내 정치에서의 갈등 요인을 키우고, 일본과의 진정한 신뢰 회복에도 장애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 교과서 왜곡, 사도 광산 세계유산 추진 등은 일본이 여전히 과거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반복되고 있다. 실용적 협력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것이 역사적 책임 회피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외교는 단지 이익을 교환하는 플랫폼이 아니라, 기억과 신뢰가 상호 존중 속에서 작동하는 인간적 관계의 확장판이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어떤 화해도 불안정하고, 어떤 협력도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5. K-컬처의 확산, 문화는 기억을 가로지를 수 있을까
일본 젊은 세대는 지금 K-컬처의 열풍 속에 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 한국 드라마, 스트리밍 콘텐츠와 화장품, 음식문화까지-문화는 국경을 넘고, 과거의 앙금을 희석하는 매개가 된다. 실제로 일본 20대의 대다수가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조사 결과는, 한일 관계의 새로운 세대교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K-컬처의 확산이 곧바로 역사적 화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는 ‘친밀감’을 만들 수 있지만, 그 친밀감이 ‘역사 인식’과 결합되지 않으면 단지 소비되고 소멸하는 감각적 환대에 그칠 수 있다.
예술은 기억을 되살리고, 감정을 연결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정책이 상업적 성공에만 집중하고, 역사적 맥락이나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려는 노력 없이 콘텐츠를 수출한다면, 이는 오히려 기억 없는 교류를 양산하는 위험한 우정이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K-컬처는 공감의 시작일 뿐, 책임의 종결이 아니다. 문화가 외교의 보완재가 되기 위해선, 감성뿐 아니라 가치와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 그러할 때만이, 문화는 정치가 놓친 화해의 미학을 실현할 수 있다.
결론: ‘성장’이라는 해답을 넘어, ‘기억’이라는 질문으로
한일 수교 60년. 한국은 일본을 넘어섰고, 일본은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정체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이 진정으로 일본을 넘었다고 말하기 위해선, 단순히 더 빠르게 성장한 것이 아니라, 더 윤리적으로 기억하고 더 정의롭게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성장은 해답일 수 있지만, 기억은 질문이다. 우리가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마주볼 때, 한일 관계는 비로소 ‘경쟁’을 넘어선 존중과 공존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 국교 정상화 60년은 성과의 정산이 아니라, 윤리의 재정렬이어야 한다. 선택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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