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투게더><포옹><셔기 베인> 영화와 회화, 소설이 말하는 정체성과 연대의 감각
세 작품은 모두 '사랑'을 중심으로 인간의 틈과 상처,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을 말한다.
이들은 사회적 금기와 침묵의 구조를 허물며 존재의 정당성을 감각적으로 서사화한다.
지금 여기, 우리는 얼마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되묻게 한다.
2. 『셔기 베인』 고단한 시대에서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
3. 에곤 실레, 〈포옹〉 닿되 닿지 못하는 관계의 초상
4. 틈, 균열, 침묵: 세 콘텐츠가 말하는 연대의 가능성
5.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태도
1. 《해피 투게더》 틀어짐 속에서 살아남는 감정의 몸짓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1997)는 퀴어 로맨스라는 단순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홍콩 반환 직전의 불안한 시대적 정체성과 그 경계에서 유예된 존재들이 남미라는 이국적 풍경 속에 흩뿌리는 감정의 파편을 그린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온 리쩅과 허보는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면서도 끝내 서로를 놓지 못한다.
이 영화는 말보다 카메라가 더 많은 감정을 말하는 작품이다. 흔들리는 카메라 워크,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조도, 그리고 이과수 폭포 앞에서의 무심한 침묵. 모두가 감정의 무게를 시각화하는 장치다. 두 남성은 이국의 땅에서조차 자신을 숨기거나 증명해야 하며, 그들 사이의 폭력은 시대가 강요한 이질성과 억압에서 비롯된다.
《해피 투게더》는 사랑을 소유나 고백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란 단어보다 먼저 오는 ‘멀어짐’과 ‘기다림’의 감각, ‘그럼에도’ 이어지는 동행의 리듬을 포착한다. 왕가위는 이성애 중심의 이야기 구조를 벗어나, 관계의 균열과 불일치를 통해 사랑이 어떻게 잔존하는지를 그려낸다. 《해피 투게더》는 그래서 언제나 관계의 중심이 아닌, 틈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것은 사랑의 핵심이 아니라,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인정과 기억의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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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셔기 베인』 고단한 시대에서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
더글라스 스튜어트의 장편 소설 『셔기 베인』은 1980년대 글래스고의 무너져가는 노동계급과 알코올중독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하는 소년 셔기의 이야기다. 표면적으로는 빈곤, 중독, 폭력이라는 소재를 담고 있지만, 이 소설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과 정체성, 그리고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애그니스는 결국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하지만, 이를 실패한 어머니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무너지는 사회 속에서도 단장을 멈추지 않으며, 자기의 삶이 남들이 정한 궤도에만 갇히지 않길 바란다. 셔기는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라는 것을 너무 이르게 자각하지만, 그 정체성은 한 번도 온전히 환대받지 못한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호모’라 불리며 학교에서, 거리에서 조롱당한다.
이 책의 진짜 울림은 셔기가 어머니를 ‘고치려는 사랑’으로 감싸 안는 데 있다. 하지만 스튜어트는 그 사랑조차도 고통스럽게 부서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셔기 베인』은 시대가 만든 상처를 개인의 실패로 오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악한 사람은 없다. 악한 시대가 있을 뿐이다.”라는 태도 아래, 스튜어트는 가난과 중독, 성소수자 혐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피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그 파편 속에서도 살아남는 감정의 근육을 이야기한다. 셔기와 애그니스가 서로를 향해 내미는 손길은 파국 속에서도 포기되지 않는 애착의 윤리를 말한다.

3. 에곤 실레, 〈포옹〉 닿되 닿지 못하는 관계의 초상
에곤 실레의 1917년 작품 〈포옹〉은 언뜻 보면 연인의 밀착을 그린 듯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것은 분리와 단절이다. 몸은 포개어져 있으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다. 이 작품은 육체적 근접이 곧 감정의 친밀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실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전야, 시대의 혼돈 속에서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과 정체성의 불확실함을 그려냈다.
그의 인물들은 욕망과 죄의식, 애정과 자기혐오 사이에서 조각난 시선으로 존재한다. 〈포옹〉에서 여성의 손은 남성의 목을 휘감고 있지만, 그것은 보호인지 억압인지 알 수 없다. 실레는 사랑의 행위보다,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의 취약함을 묘사한다. 이는 《해피 투게더》와 『셔기 베인』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조다.
사랑은 늘 결핍 속에서, 완결이 아니라 결여된 상태에서 도드라진다. 실레의 그림은 정체성과 사랑의 틈에 있는 인간의 복합성을 가장 응축된 형태로 시각화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 틈은 지금 이 시기, 한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에서도 여전히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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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틈, 균열, 침묵: 세 콘텐츠가 말하는 연대의 가능성
《해피 투게더》의 허보는 사랑을 붙잡기 위해 리쩅을 붙잡고, 리쩅은 그 무게에 짓눌린 채 혼자 시장을 떠돈다. 『셔기 베인』의 셔기는 어머니의 중독을 자기 잘못으로 받아들이며, 그를 고쳐야 한다는 절망적 확신 아래에서 성장한다. 〈포옹〉의 인물들은 접촉 속에서 오히려 소외된다. 이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완전한 접촉의 불가능성을 전제하고 출발한다.
그러나 바로 그 틈새에서, 우리는 인간다움과 연대를 발견하게 된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해 갈등하고 상처 주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이어지는 시도, 내미는 손, 고개 돌린 채의 포옹 속에서 연대의 흔적은 남는다. 윤여정이 “아들보다 사위를 더 사랑한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단지 개인의 고백이 아니라 사회적 침묵을 깨는 서사적 제스처였던 것처럼.
침묵은 단지 무관심이 아니라, 금기이자 구조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결핍을 지지의 언어로 바꾸게 된다. 이 세 작품이 말하는 사랑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시대 조건 속에서 균열 되고 다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다. 사랑은 완전함이 아니라, 결여에 대한 책임감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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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태도
윤여정의 고백, 셔기의 고군분투, 실레의 불완전한 포옹이 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타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이것은 단지 성소수자 인권이나 가족의 사랑을 넘어서,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존재를 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여전히 커밍아웃을 ‘이슈’로 소비하고, 다름을 ‘이해’해야 할 대상이라 여긴다. 하지만 존재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존재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사실이다. 《해피 투게더》는 ‘사랑할 수 없음’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셔기 베인』은 사랑으로는 구조를 바꿀 수 없지만, 사랑 없이도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는 역설을 말한다. 그리고 〈포옹〉은 접촉 속에서도 비어 있는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완전한 접촉보다 불완전한 이해의 용기를 기르는 것이다. 틈은 위험하지만, 그 틈이야말로 공감과 책임이 스며드는 공간이다. 사랑은 늘 그 경계에서 출발한다. 윤여정이 그렇게 말했듯, 늦게 도착한 사랑이 더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그 말이 사랑을 시작하게 만든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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