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산불 피해, 서울 절반 삼킨 불길. 지리산까지 번져
- 도로도 바다도 피난길, 동해안 주민들 ‘마지막 탈출’
- 수만 명 대피, 끊긴 전기와 전화… 불완전한 구조망
- 헬기와 비, 그리고 바람… 진화율 40%의 고비
- 소방대원의 희생…“불이 우리를 쫓아왔다.”
- 지리산까지 번진 불씨… 무너진 삶의 울타리
- 산불은 재난을 넘어선 경고
검은 연기가 뿌옇게 내려앉은 경북 북부 하늘은 더 이상 고요를 품지 못한다.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은 탄 내와 함께 정적에 잠겼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몇 방울의 비마저 절박한 기도로 받아들여졌다. 의성에서 시작된 불길은 안동, 청송, 영양, 영덕으로 번지며 서울 면적 절반을 삼킬 만큼의 재앙으로 변모했다. 불씨 하나가 촉발한 이 참극은 어느새 일상의 지도를 지워버렸다.
7번 국도를 따라 대피하는 차량의 행렬은 정체된 시간이었고, 도로 위는 주차장이자 탈출구였다. 산불은 동해안 바닷가 마을까지 번졌고, 정전과 통신 두절 속에 해안으로 몰린 주민들은 배를 타고 탈출해야 했다. 불길에 갇힌 이들은 바다 끝에서조차 의지할 곳이 없었다. 해경의 구조선은 그들이 붙든 마지막 희망이었다.
매정리의 노인요양시설을 태운 불길로 인해 요양 차량이 열기 속에 폭발하며 환자 3명이 숨졌다. 피할 틈도 없이 불은 포탄처럼 떨어졌고,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 불씨는 삶의 자취를 쓸어갔다. 시커멓게 그을린 집 앞에서 물을 뿌리는 노인들의 손엔 절박함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잃어버린 것을 향해 마지막 물줄기를 뿜고 있었다.
청송의 대피소조차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체육센터로 모였던 주민들은 인근 산에 불이 옮겨 붙자 다시 밤길을 걸어 문화예술회관으로 향해야 했다. 대피소에서조차 불안한 밤을 견뎌야 했던 노인들은 불빛이 비추는 방향을 따라 눈을 떼지 못했다.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불이 또 올까 무서워요." 한 어르신의 말은 바윗덩이 같은 걱정을 토해냈다. 몸 깊숙이 새겨진 위기의 예감이었다.
하회마을의 피난민 중 일부는 맨손으로 손녀의 집으로 도망쳤다. 구십을 앞둔 노인이 생애 처음으로 마을을 등졌다. 그들은 차마 집에 손도 못 대고, 손가락 하나로 닫아둔 문짝을 눈물로 밀쳐야 했다. 차 안에 앉은 노인은 딸이 짐을 챙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한 세기를 산 사람의 말치고는 너무 간절한 기도였다.
불씨는 산을 넘어 공장과 집, 종교시설까지 집어삼켰다. 경북 지역 4개 시군에서만 22명이 숨지고, 18명이 다쳤으며, 주민 2만 2천여 명이 긴급히 대피했다. 일부는 돌아왔지만, 타버린 삶의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전화는 끊겼고, 전기는 멈췄으며, 사람들의 말은 연기 속에서 묻혔다. 어떤 주민은 "도망치고도 수습할 방법이 없다"라고 했다. 물도 연기도, 생존도 그저 불완전했다.
산림청은 새벽 일출과 함께 다시 헬기를 띄웠다. 그러나 시야는 연무로 가려졌고, 불길은 바람의 속도에 발맞춰 다시 살아났다. 강풍은 불을 부채질했고, 대기 건조는 불씨를 먹였다. 헬기 한 대가 꺼내든 물줄기는 불기둥 앞에선 너무나 가늘었다. 진화율은 40%대를 맴돌았다. 가장 필요한 건 비였지만, 비는 5mm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 예보됐다. 그마저도 지역에 따라 더 모자랄 뿐이었다.
소방대원과 공무원들도 연기 속을 뚫고 진입했다. 경남 창녕에서 진화 작업 중 고립됐던 4명이 숨졌고, 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한 진화대원은 "불을 쫓는 게 아니라 불이 우리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소방호스를 손에 쥔 채 뒷걸음질 쳤고, 연기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움직였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누군가 죽거나 다친다"라는 말은 너무도 아프고 가장 오래된 동료애의 방식이었다.
지리산 자락까지 산불은 번져나가고 정말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공원 경계에서 멈춰 선 불길은 언제든 재확산될 수 있다. 산청과 하동에서 대피한 주민은 1,500명을 넘었고, 주택과 공장 등 70여 개 시설이 불에 탔다. 그들의 손에는 고작 가방 하나, 주머니 속에 접어둔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보슬비가 오락가락했지만, 마른 잎과 나무껍질은 이미 바싹 말라 있었다. 비는 그들의 절망을 충분히 덮어주지 못했다.
이제 산불은 일시적인 자연재해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취약한 민낯을 드러내는 참사가 되어버렸다. 긴박한 현장에선 생명과 연기, 구조와 고립이 공존한다. 사람들은 불씨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고, 국가는 그들을 위한 망이 되어야 했다. 아직 남은 불길 앞에 선 이들은 더 많은 지원과 연대를 바란다. 이 비극을 기억해야 할 시간,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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