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센과 치히로〉× 클림트 × 『이방인』 : 상실과 회복

시대作 2025. 4. 2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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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 클림트 × 『이방인』: 상실과 회복의 미로를 건너는 감정의 서사

 

서로 다른 매체의 작품들이 하나의 철학적 맥락에서 교차한다면, 어떤 감정이 솟아오를까?

이 글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통해 ‘상실과 회복’, ‘무감각과 연대’라는 키워드로 감정의 서사를 다시 구성해본다.

 

 

🔖 1. 이름을 빼앗긴 소녀의 감정 회복 서사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성장 서사를 넘어서는 고유의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이 세계에서 소녀 치히로는 현실의 언어를 잃고, 새로운 규칙과 존재론이 작동하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이야기이다. 부모가 탐식 때문에 돼지로 변하고, 치히로는 ‘치히로’라는 이름을 빼앗긴 채 ‘센’이 된다.

 

이는 곧 존재의 상실이며, 언어와 정체성의 붕괴를 뜻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실의 공간에서 치히로는 새로운 감각을 얻기 시작한다. ‘가마 할아범’, ‘하쿠’, ‘린’과의 관계 속에서 언어는 다시 의미를 찾고, 정체성은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복원된다. 눈에 보이지 않던 존재들, 곰팡이처럼 들러붙던 오물신, 말 없는 가오나시의 고독한 몸짓 속에서 치히로는 감정을 회복해 간다.

 

‘이름’의 상실은 단순한 명칭의 박탈이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던 정체성의 붕괴이며, 세계와의 연결이 끊긴 상태를 의미한다. 이 영화의 마법은 성장의 미화가 아니라, 상실과 불완전함을 견디는 태도에 있다. 결국 치히로는 이름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과 기억의 세계를 되찾은 ‘존재의 회복’이다.

 

🎬 BFI에서 공식 소개하는 영화 내용 더 보기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스틸컷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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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 얽힘과 순환의 상징

구스타프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는 뿌리와 가지가 서로를 파고들며 복잡하게 얽힌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삶은 곧 연결이고, 분리된 실존이란 없다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황금빛 나무의 가지는 끝없이 뻗어나가며 서로를 감싼다. 이는 단절이 아닌 순환의 구조이며, 치유와 연결의 기호로 읽힌다.

 

나무 속 인물들은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흐름 속에 있는 존재로 보인다. 각 인물은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서로의 곁에서 의미를 발화하는 관계적 존재로 그려진다. 치히로가 겪은 변화는 바로 이 ‘미로 같은 얽힘’ 속에서의 자기 발견과도 닮았다. 또한 가오나시처럼 경계에 서 있는 인물도, 이 생명의 나무에서 배제되지 않고 한 갈래를 이루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황금빛의 장식성과 곡선의 반복은 단절이 아니라, 감정과 삶이 뒤엉켜 생성되는 복합적 존재의 미학이다. 클림트의 작품은 미야자키의 서사처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명을 다시 정의한다. 나무의 곡선은 운명이 아닌 의지로 얽히는 관계이며, 그 안에서 인간은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감응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Gustav Klimt(1862–1918) The Tree of Life(1909, 200x102cm)
Gustav Klimt(1862–1918) The Tree of Life(1909, 200x102cm)

 

🔖 3. 감각을 잃은 세계, 혹은 존재를 견디는 방식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세상의 질서에 무관심한 인간, 뫼르소를 통해 실존주의적 냉소를 보여준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울지 않으며, 사랑에도 의심으로 응답한다. 뫼르소에게 세계는 감정의 무대가 아니라, 관조의 장소에 가깝다. 그러나 바로 그 무감각이 카뮈가 보여주려는 핵심이다.

 

그가 경험하는 세계는 의미가 붙기 이전의,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는 거대한 배경과도 같다. 인간은 의미를 덧붙이며 살아가지만, 세계는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는 냉정한 진실. 치히로와 달리,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질서 사이에서 끝내 화해하지 못한다.

 

그는 끝내 세계와 접속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조차 하나의 정직한 실존의 방식으로 읽힌다. 뫼르소는 치히로처럼 성장하거나 회복되지 않지만, 그것이 그가 처한 세계의 리얼리티다. 존재를 감각하는 두 극단은 결국 인간 조건에 대한 또 다른 응답일 뿐이다.

 

 

카뮈의 이방인(L'Etranger) 표지
카뮈의 이방인(L'Etranger) 표지

 

🔖 4. 얽힘의 미학: 클림트와 카뮈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치히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클림트의 시각적 구조와 카뮈의 사유적 구조 사이에서 그 진폭을 넓힌다. 치히로는 뫼르소처럼 무감각한 세계에 떨어지지만, 클림트의 나무처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되찾는다. 즉, 뫼르소는 상실로 존재를 증명하고, 치히로는 회복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두 세계는 정반대의 방향을 지향하지만, 그 사이에서 ‘감정’은 공통된 물음으로 떠오른다. 클림트의 회화는 두 세계를 이어주며 다리처럼 기능한다. 나무는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순환과 생명의 비유로 다시 태어난다. 치히로가 부모와 다시 재회하는 순간, 그 시간은 나선형으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가지처럼 다른 층위를 형성한 세계다.

 

‘감정’은 단순히 감각의 작용이 아니라, 존재를 연결하고 구성하는 근원적 매개체가 된다. 이처럼 영화는 회화의 시각적 질서를 받아들이고, 소설의 부정적 실존을 통과해 감정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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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세 개의 경계, 그리고 인간 존재의 시적 연대

〈센과 치히로〉의 환상성, 클림트의 상징성, 『이방인』의 철학성은 서로 다른 매체의 언어로 이야기하지만, 그 중심에는 ‘존재와 감각의 회복’이라는 동일한 메시지가 놓여 있다. 이름을 잃은 치히로, 얽힌 나무의 가지, 무표정한 뫼르소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마주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엇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타인과 감정, 언어와 기호, 상실과 회복의 미로 속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는 진실. 이 세 작품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언제, 누구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나를 다시 만났는가?

 

예술은 삶의 질문에 직접적인 해답을 주진 않지만, 그 길을 환하게 비춘다. 상실로 시작된 이야기들은 결국 얽힘과 감각의 복권으로 끝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가 예술 안에서 되찾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유익한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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