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이슈

현금 없는 사회, 편리함과 불편함: 디지털 결제가 바꾸는 풍경

시대作 2025. 5. 18. 15:17
반응형

 

현금 없는 사회, 편리함과 불편함: 디지털 결제가 바꾸는 풍경

현금 사용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디지털 결제의 확산은 우리의 삶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바꾸었지만, 그 이면에는 배제와 소외가 존재한다.
이 글은 무현금 사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문화와 제도의 변화를 함께 바라보며 공존을 위한 방향을 모색한다.

1. 현금 사용 감소의 시작과 진행 속도

한국에서 현금 사용이 본격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중반.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징후는 있었다. 편의점에서 카드를 긁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공공요금조차 자동이체로 빠져나갔다. 지갑 속 지폐가 점점 눌리고, 카드 뒷면의 마그네틱 선만이 닳아갔다.

 

2015년에는 결제의 약 40% 가까이가 여전히 현금이었지만, 2021년에는 20% 수준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스마트폰을 통한 결제는 단지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소비 습관의 개혁이었다. 배달앱에 카드 정보를 저장하고, 주차장에서도 QR코드로 빠져나오는 게 일상이 됐다.

 

변화의 속도는 세대 간 체감 차이를 낳았다. 10대와 20대는 동전을 만질 일조차 드물다. 하지만 60대 이상은 여전히 ATM 앞에서 오래 서 있다. 그리고 이 불균형은 단순한 세대차가 아니라 금융 접근성의 격차라는 구조적 문제로 번지고 있다.

정부 전자문서지갑
정부 전자문서지갑

2. 현금 없는 사회가 가져온 변화들

● 교통

서울 시내버스 일부 노선에서는 이미 현금 승차가 불가능하다. "잔돈이 없으니 다음 버스를 타세요."라는 문장이 무력해진 시대다. 지하철에서도 교통카드 외에 선택지는 거의 없다. 지갑 없이 출근하는 직장인은 늘었고, 반면, 현금을 고집하던 일부 고령자들은 대중교통 이용 자체를 줄이게 된다.

이런 흐름은 교통비 지원 정책에도 영향을 끼친다. 지역 화폐나 교통 복지 포인트가 디지털 방식으로만 지급되면서, 디지털 접근 능력이 곧 복지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 소매업

무인점포가 속속 늘고 있다. 아이스크림 할인 매장, 컵밥 자동 판매기, 심지어 미용실 예약과 결제도 키오스크로 이뤄진다. 현금은 통용되지 않는다. "현금은 안 받습니다"라는 문구가 매장 입구의 기본 문장이 되었고, 점주는 세금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자구책이라 말한다.

● 노점상

예전엔 지폐 몇 장을 쥐고 군밤을 샀다. 이제는 노점상 앞에도 ○○페이 가능합니다라는 알림판이 붙는다. 손님이 적을 때, 상인은 QR코드를 종이에 프린트해 붙여두었고, 손님은 휴대폰 화면을 몇 번 눌러 간단히 결제를 마친다. ‘현찰 없으면 못 사요라는 거절의 말은 사라졌다. 그러나 동시에, 스마트폰 없는 손님은 묵묵히 지나친다.

일본 QR 코드
일본 QR 코드

 

3. 현금 없는 사회가 바꾸는 문화의 단면들

● 경조사

봉투는 더 이상 두툼하지 않다. 결혼식장에 도착하지 않아도, 모바일로 계좌번호를 받아서 송금하면 된다. 장례식장 조문도 메시지 한 줄과 함께 이체가 이루어진다. 의례는 간소해졌지만, 그만큼 몸의 시간도 축소되었다.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마주잡던 온기는 점차 희미해진다. 돈은 오가지만, 인간은 스치지 않는다.

● 기부

현금 동전 하나 없는 주머니로도 기부하는 게 가능해졌다. 유튜브 생방송을 보며 슈퍼챗으로 기부하고, 긴급 구호가 뜨면 카카오페이로 몇 초 만에 정해진 금액을 보낸다. 익명성과 속도, 그리고 손쉬움은 기부를 일상화시켰다. 하지만 익명의 기부는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동네 교회 헌금함에 동전을 넣던 행위는 사라지고, 대신 앱 화면에만 숫자가 남는다.

▓▒░ 통계청: 가계 소비 지출 및 현금 사용 통계 ░▒▓

 

4. 현금 없는 사회의 명암

● 좋은 점

  • 편의성: 지갑은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갔다.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결제가 끝나고, 번거로운 거스름돈 정산도 없다. 특히 빠르게 회전하는 소매업에선 이 효율이 곧 경쟁력이다.
  • 투명성: 모든 거래가 기록된다. 이건 회계의 정직성을 높이고, 세금 회피를 줄이는 방패가 된다. 지하경제의 그림자는 좁아지고, 자금 추적은 명료해진다.
  • 비용 절감: 현금을 찍어내고, 운반하고, 분류하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이 막대하다. 현금 없는 사회는 그 비용을 줄이고, 은행의 물리적 인프라를 줄일 명분이 된다.

● 폐단

  • 금융 소외: 현금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점차 외면당한다. 농촌, 고령자, 장애인, 그리고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사회의 결제 시스템에서 ‘배제’당하고 있다.
  • 시스템 의존성: 서버가 멈추면 결제도 멈춘다. 정전, 통신 장애, 해킹… 그 모든 리스크는 결국 개인의 일상에 직격탄이 된다.
  • 감시와 추적: 거래가 편리해지는 만큼, 자율성은 줄어든다. 모든 소비는 기록되고 분석된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어떤 술을 마셨는지, 어디에 다녀왔는지까지. ‘데이터 경제’라는 이름 아래, 사생활은 탈의된 채 넘겨진다.
청첩장과 QR 코드
청첩장과 QR 코드

 

5. 해외 사례와의 비교

스웨덴은 가장 빠르게 현금 없는 사회로 전환한 나라다. 거리의 구걸자조차 모바일 결제 QR코드를 목에 걸고 있다. 스톡홀름 시민의 90% 이상이 현금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중국은 또 다른 방식이다. 알리페이와 위챗페이가 단지 결제 수단이 아니라, 삶의 플랫폼이 되었다. 병원 예약부터 택시 호출, 공과금 납부까지 하나의 앱으로 해결한다. 하지만 이 중앙집중형 결제 시스템은 감시 사회의 그림자도 드리운다.

 

반면 독일과 일본은 다르다. 고속철도표조차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고, 중소상인들은 아직도 카드보다 현금을 선호한다. 이들은 디지털 속도보다 금융의 존엄을 중시하는 문화적 저항을 보여준다.

6. 결론: 공존을 위한 설계

현금 없는 사회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질서, 시간의 구조, 그리고 공동체의 형식을 바꾸는 일이다. 따라서 전면적인 현금 폐지가 아닌, 단계적 이행과 제도적 배려가 필수적이다. 디지털 결제의 확산 속에서도, 현금을 사용할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 그래야만 이 변화가 어떤 계층도 버리지 않는 '포용적 전환'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모든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 있는 사회에서조차, 지폐 한 장의 온기와 그 뒷면의 땀방울은 완전히 사라져선 안 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