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철학과 자본 사이에서 길을 잃다
봉준호의 실험, 그 한계에 대한 다층적 진단
2025년, 봉준호의 신작 〈미키 17〉은 세계적 기대와 함께 개봉했다. 아카데미와 칸을 석권한 감독의 첫 할리우드 메이저 프로젝트이자, 2,000억 원에 가까운 제작비가 투입된 고예산 SF 영화. 로버트 패틴슨과 마크 러팔로, 토니 콜렛 등 화려한 출연진, 철학적 주제를 품은 원작 소설의 각색이라는 조건은 분명 기대를 키웠다. 비평적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로튼토마토 88%, "사려 깊고 설득력 있는 작품"이라는 엠파이어의 평처럼, 비주얼과 주제 의식 모두에서 일정 수준의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박스오피스 성적은 이와 거리가 멀다.
1. 초라한 흥행 성적
숫자가 말하는 현실 전 세계 누적 수익은 3주 차 기준 약 1억 1,000만 달러. 순제작비 1억 1,800만 달러조차 회수하지 못했으며, 손익분기점인 3억 달러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북미 개봉 성적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고, 국내에서도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했음에도 300만 명 문턱을 넘지 못했다. 워너브라더스는 손실액을 약 1,100억 원 이상으로 추정 중이다. 이는 단순한 수익 실패가 아니라, 글로벌 제작 시스템 안에서 창작자의 위치와 비전이 어떤 위상을 지니는지를 되묻게 한다.
2. 마케팅의 분열과 세계관의 이중성
흥행 부진에는 마케팅 전략의 분산도 한몫했다. 미국 예고편은 블랙 코미디적 측면을 강조했지만, 한국 예고편은 정서적 서사에 초점을 맞췄다. 봉준호 특유의 장르 혼합과 급작스러운 톤 전환은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혼란을 주었고,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 마케팅은 결국 타깃층을 명확히 포착하지 못했다. 게다가 영화 내부에도 일관성의 문제가 존재한다. 인간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그리면서도, 외계 생명체 크리퍼에게는 조건 없는 포용을 설파하는 대목은 봉준호 세계관의 통합에 균열을 만든다.
3. 작품의 주제와 존재론적 탐구의 성과
〈미키 17〉은 복제, 반복, 소모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간 존재의 윤리를 탐색한다. 반복적으로 죽고 다시 프린트되는 소모품 노동자 미키는 시스템에 의해 자아를 상실하는 현대 인간의 상징이다. 미키 17과 미키 18의 내적 충돌은 ‘진짜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으로 이어지며, 산업사회에서의 노동 착취, 디지털 시대의 정체성 위기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영화는 이러한 주제를 차분하고 해설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며, 일부 관객에게는 정서적 고조 대신 거리감을 주는 결과를 낳는다. 그 과정에서 서사의 진폭이 다소 제한되고 감정선의 몰입도가 낮아졌다는 평도 존재한다.
4. 비주얼과 연출의 균형, 그리고 봉준호 스타일의 변화
연출 스타일도 전작들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니플하임 행성의 음울한 풍경, 차가운 우주선 내부, 절제된 세트 구성은 인간 소외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크리퍼’의 생물학적 디자인은 인간 중심주의 시스템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이 강렬한 감정적 고조로 이어지진 않는다. 반복되는 죽음과 리셋은 은유로 기능하되, 관객의 감정선을 끝까지 끌어올리지 못하고 절제된 연출로 마무리된다. 과거 봉준호 영화가 지녔던 ‘질주하는 감정의 파열음’은 이번엔 의도적으로 억제된 듯하다.
5. 자본의 꿈과 창작의 현실
〈미키 17〉은 워너브라더스가 ‘작가주의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감행한 프로젝트였다. <바비>와 <웡카>의 성공 이후 선택된 전략의 연장선이었다. 그러나 봉준호가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창작자로서의 색을 완전히 발현하기란 쉽지 않았다. 창의성과 상업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봉준호의 고민은 정제된 내러티브, 절제된 감정, 친절한 해석으로 귀결되었다. 그래서일까, 이전처럼 돌발적이고 파격적인 미학이 아닌 '안전한 선택'으로 읽혔다.
6. 미래를 위한 제언: ‘기성의 질서를 거스르는 봉준호’의 회귀?
이 영화에서 진짜 아쉬운 지점은 흥행 수치보다, 봉준호가 보여줬던 ‘불온한 감수성’의 부재다. <괴물>에서 미국을, <기생충>에서 계급 구조를, <옥자>에서 생명 착취의 본질을 건드렸던 봉준호는 이번 작품에선 한층 얌전하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변곡점일 수도 있다. 인간 복제, 존재의 윤리, 시스템 내 정체성의 소멸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하다. 다만 관객이 기대했던 건 논리의 설득보다 감정의 격류였고, 철학의 구조보다 서사의 균열이었다.
결국 〈미키 17〉은 실패라기보다는, 한 걸음 멈춘 실험이다. 봉준호는 분명 여전히 유능한 이야기꾼이며, 그 이야기꾼이 다음 작품에서 다시 '불온한 질문'을 품고 돌아오길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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