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한강 이전, 한국 문학의 세계화. 해외 번역의 역사와 오늘

시대作 2025. 3. 2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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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이전에도 한국 문학은 세계에 있었다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 역사와 오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이름이 한국 문학의 외연을 국제적으로 확장한 상징적 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은 아니다. 한강 이전에도 한국 문학은 여러 작가의 묵묵한 문장과 격정의 언어로 세계문학의 장을 조용히 두드려왔다. 그 문은 때로 무겁고, 때로 낯설었지만, 분명히 열린 적이 있었다. 이 글은 그 열린 순간들을 살펴보며, 한국 문학이 걸어온 세계와의 문학적 접점을 되짚고자 한다.

 

 

1. 해외 번역의 씨앗, 1950~60년대

1950년대는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겨우 숨을 고르던 시기였지만, 이미 그 시절부터 번역을 통한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은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김동리, 황순원, 김소월의 작품 일부가 일본, 미국 등지에서 소개되었다. 특히 김동리의 단편 <무녀도>는 영문 번역본이 1960년대 초 해외 문학지에 실리기도 했다. 이 시기의 번역은 주로 문화 외교의 성격을 띠었지만, 동시에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가 외부 세계에 통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실험장이기도 했다.

 

 

2. 초국적 작가의 등장 – 이미륵과 최인훈

이미륵은 1940년대 독일에서 활동한 한국 최초의 문학가로, 그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어로 먼저 출간되었고 지금까지도 유럽에서 꾸준히 읽힌다. 그의 문장은 단순하지만, 조국에 대한 회한과 유년기의 빛나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독일어권에서 문학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한국 작가라는 점에서, 이미륵은 한강 이전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존재다.

 

한편, 최인훈은 광장으로 국내 문학사의 전환점을 만든 인물이지만, 영어권 학계에서도 한국 분단문학의 대표 작가로 지속해서 연구되고 있다. 그의 문학은 철학적 깊이와 상징성으로 인해 번역의 장벽이 높았다. 그럼에도 점차 인정받으며, 한국 문학의 보편성과 고유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

 

 

3. ‘민중’의 서사를 번역하다 – 조정래, 황석영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사회적 격동이 문학을 통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스페인어, 중국어로 번역되어 정치적 사상 대립과 민중 서사를 그린 장대한 이야기로 소개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그의 작업은, 한국적이되 보편적인 진실을 말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은 베트남전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한국인의 내면을 밀도 높게 그려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되며 정치적 사실성과 인간적 고뇌를 함께 전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베트남에서의 출간은 식민지-전후-냉전이라는 초국가적 상처의 공유를 매개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4. 시를 번역하다 – 고은과 김혜순

시야말로 번역의 가장 난해한 장르다. 그러나 고은은 만인보를 비롯한 시집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활발히 번역되며 동양적 서사시의 경지로 평가받았고,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언급되기도 했다. 고은의 시가 지닌 구체성과 보편성, 동시대성을 동시에 아우르는 힘은 한국 문학의 가능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였다.

 

또한 김혜순은 여성성의 시학을 독창적으로 그려낸 시인으로, 죽음의 자서전등이 번역되며 영미권 시인과 비평가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녀의 시는 신체적 감각, 심리적 충격, 그리고 사회적 구조를 교차시키며 한국적 여성성의 특수성과 보편적 페미니즘의 접점을 보여준다.

 

 

 

5. 해외 문학상 수상 사례

한강 이전에도 국제 문학상에서 한국 작가들이 주목받은 사례는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이문열은 프랑스 메디치상 외국문학상후보에 오른 바 있으며, 이청준은 독일, 오스트리아 문학계에서 동아시아의 카프카로 소개되며 현지 문학 저널에서 집중 조명되었다. 특히 벌레 이야기는 인간 조건의 공포와 소외를 치밀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유럽 비평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에는 정유정, 천명관, 김언수 등의 작품이 범죄, 스릴러, 장르문학의 경계에서 활발히 번역되고 있으며, 장르문학이 한국 문학의 또 다른 수출로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6. K-컬처와 한국 문학의 재조명

한강의 수상 이후, BTS, 봉준호, 오징어게임으로 이어진 K-컬처의 확장 속에서 한국 문학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과거에는 역사적 아픔과 분단의 상처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제는 존재론적 고독, 젠더와 정체성, 기후와 감각이라는 보다 세계적인 담론 속에서 한국 문학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영미권 출판사들이 자국 작가의 작품만큼이나 한국 작품에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번역가들의 역량 또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데보라 스미스, 안톤 허, 장미란 등의 번역가는 기계적인 언어 중계를 넘어, 문학의 감정과 세계를 함께 옮기는 동반자로 인정받고 있다.

 

 

7. 결론 – ‘한강 이후’가 아니라 ‘한국 문학의 연속성’

한강은 시작이 아니라 흐름이었다. 그 흐름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줄기를 만들었고, 그녀는 그 물줄기 위에 선 한 사람일 뿐이다. 한국 문학은 이제 더 이상 특정한 상을 통해서만 세계에 닿지 않는다. SNS, 넷플릭스, 플랫폼 기반의 서사 확장, 그리고 번역 문학 시장의 활성화는 한국 문학을 새로운 세계성과 접속시키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가 상을 받았는가?’ 이게 아니라, 누가 세계와 통하는 언어로 한국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이다. 그 언어는 점점 다양해지고, 더 정교해지며, 동시에 더 쉽게 읽힌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한강 이전이 아닌, ‘한국 문학의 흐름 속에서 한강 이후를 사유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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