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항쟁, 네 개의 소설로 만나다
역사의 상흔을 길어 올리는 문장들
<순이 삼촌>부터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문학은 어떻게 국가폭력을 껴안는가
네 권의 소설, 서사 방식과 문학적 윤리 고찰
제주 4‧3은 잊혀진 민중의 비명이자, 아직 끝나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물음표다. 문학은 그 상처를 드러내는 거울이자, 역사를 감각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다. 이 글은 소설 속 언어를 통해 4‧3을 다시 읽고, 그 침묵과 저항의 결을 짚는다.
제주 4·3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국가폭력 중 하나로, 긴 침묵 끝에 문학을 통해 말해지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의 <화산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김유철의 <레드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각 작품이 4·3에 접근하는 방식과 서사 전략, 그리고 그들이 엮어내는 문학적 연대의 결을 살핀다. ‘기억의 윤리’는 문학의 자리이자 시대의 책임이다.
🔸 현기영 <순이 삼촌> 침묵의 육성을 복원하다
1978년 발표된 <순이 삼촌>은 제주 4·3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한국 소설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말을 잃은 여성 '순이 삼촌'의 삶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증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현기영은 피해자의 고통뿐 아니라, 제주도민 전체가 짊어진 침묵의 구조를 해체하며, 말 없는 몸짓과 눈빛에 각인된 기억의 결을 따라간다.
작품은 순이 삼촌이라는 인물을 통해 집단적 트라우마의 상징을 창조하고 제주의 토속 언어와 풍광을 서사의 바탕으로 삼아 현장감을 극대화한다. 그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고통의 진실 앞에서 차마 비껴가지 않으려는 윤리적 긴장으로 팽팽하다. 이 작품은 문학이 어떻게 ‘말하지 못한 역사’를 대신 말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억의 선언문이자, 이후 4·3문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 김석범 <화산도> 민중의 역사로서 4·3을 다시 쓰다
재일제주인 작가 김석범의 <화산도>는 방대한 서사로 4·3을 민중의 역사 속에 위치시킨다. 단순한 피해 기록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분단 체제까지를 관통하는 역사적 맥락 속의 항거로 그린다. 작가는 망명지 일본에서, 고향의 기억과 조국의 불의에 대해 글로 맞서는 방식으로, 자기 정체성의 파편들을 모아 이 거대한 서사를 완성했다.
4·3은 이 소설에서 더 이상 지역적 비극에 머물지 않고, 국가가 억압한 진실과 식민 잔재가 낳은 분단 구조의 뿌리로 확장된다. 서사에는 수십 명의 인물과 세대를 아우르는 네트워크가 등장하며, 이들의 삶은 곧 민중의 삶, 그 총체적 감정으로 이어진다. <화산도>는 4·3을 ‘억눌린 진보의 역사’로 복원하며, 문학이 기억의 통로이자 정치적 저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감각과 상징으로 기억을 포개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4·3을 간접적으로 마주한 인물의 시선을 통해, 기억의 연속성과 윤리성을 탐색한다. 폭력 그 자체보다는 상흔의 감각과 감정의 밀도를 포착하며, 한 편의 긴 시처럼 독자를 감싸는 서사를 펼친다. 한강은 이 작품에서 직접적인 묘사 대신, 안개, 물, 빛, 바람 같은 상징을 통해 고통을 '느끼게' 하는 문학의 감각적 윤리를 실현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끝내 나누지 못한 마지막 인사, 그 부재의 장면을 붙들며 전개되고, 시간은 일직선이 아니라 되감기고 겹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기억은 개인의 몫이면서도 시대의 몫이며, 그 기억을 지켜내는 일이 살아남은 자에게 부여된 책무로 그려진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결국, 문학이 말할 수 없는 것을 감각의 언어로 전이시키며 망각에 맞서는 존재의 애도이자 문학의 다짐이다.
🔸 김유철 <레드 아일랜드> 진실을 추적하는 현재형 서사
언론인 출신 작가 김유철의 <레드 아일랜드>는 현대의 시점에서 4·3을 재조명한다. 유골 발굴, 생존자 증언, 취재 기록을 바탕으로 미스터리 구조의 사실적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현실 사건과 픽션을 교차시키며 전개되는 서사는 우리가 진실을 묻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뒤늦고 불완전한지를 끝없이 되묻는다.
주인공은 단순한 조사자가 아니라, ‘기억의 부름’을 받아 어두운 과거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자이며, 독자 역시 그 행보에 동참하게 된다. 그 안에서 가해자는 더 이상 익명의 권력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를 사는 우리 안의 구조적 공모로 드러난다. <레드 아일랜드>는 과거를 향한 서사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4·3을 호명하는 현재진행형의 문학적 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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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어떻게 4·3과 작별하지 않는가
네 편의 작품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주 4·3을 응시하지만, 결국 ‘기억하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모인다. <순이 삼촌>은 말 잃은 자들의 육성을 복원한다. <화산도>는 민중의 항거로 4·3을 자리매김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기억의 감각을 확장한다. <레드 아일랜드>는 진실 추적의 현장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이들은 침묵의 시대를 지나온 문학의 자취이며, 지금의 우리가 서 있는 윤리적 경계를 다시 묻는다.
🔸 제주 4·3을 다시 묻는다는 것: 기억, 말하기
제주 4·3은 말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문학은, 끝내 작별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그 이야기를 계속 짓는다. 지금 우리가 4·3을 다시 읽고 다시 쓰는 일은, 단지 과거를 향한 시선이 아니다. 그것은 망각과 외면에 맞서는 오늘의 책임이며, 문학이 감당해야 할 시대의 윤리다.
“우리는 아직, 작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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