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 작가의 칼럼(4월 18일)에 부쳐: 작가는 무엇으로 침묵하는가
✔️ ‘표현하지 않을 자유’가 타인의 발언을 억압할 수는 없다.
✔️ 414인의 성명은 문학적 신념이자 시대를 향한 윤리적 기록이었다.
✔️ 지금 문학은 침묵이 아닌, 헌법의 언어로 말해야 할 때다.
✍ 작가는 무엇으로 침묵하는가
“보편적 가치는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작가의 자유는 언제부터 방관의 다른 말이 되었는가.”
김별아 작가는 조선일보 4월 18일 자신의 칼럼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414명 문학인의 ‘탄핵 성명’을 두고 “못 쓴 소설 같은 현실”이라는 자조와, ‘보편적 가치’라는 표현의 무리함을 언급하며, 오히려 이에 참여하지 않은 작가들의 권리를 옹호한다.
그러나 그 논리는 몇 가지 결정적인 오해와 본말전도의 착각에서 출발한다. 어쩌면 그 목소리에는 진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단지 글의 품격을 따질 만큼 한가하지 않다. 문학의 언어가 다시 광장을 향해 걸어 나간 데에는 이유가 있다.
🖋 표현의 자유와 연대의 윤리
김 작가는 “표현하지 않을 자유”를 강조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논의되는 사안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비상계엄 기도와 내란적 충동에 대한 문학인의 응답이었다. 이는 표현의 자유 이전에, 헌법을 지키려는 양심의 행위이며, ‘시국선언’이라는 형식을 빌려 문학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것이다.
우리가 읽어낸 건 한 줄의 슬로건이 아니라, 작가가 작가로 남기 위해 치러야 했던 결심의 기록이다. 펜을 드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면, 그 선택 또한 존중받아야 하겠지만, 그 침묵이 타인의 외침을 비판하는 데 사용될 순 없다. 지금은 누구보다 말해야 할 사람들이 말하고 있었고, 그 말은 책이 아니라 삶에서 길어 올린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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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포스팅. <한강 비롯한 414명 탄핵 촉구 시국선언>
📚 '왜 묻지 않았는가'라는 질문
김별아 작가는 ‘명단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언제 어디서 중지를 모았느냐”며 마치 음모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지난번 성명은 공식 단체의 주도가 아닌, 비공개 자발 연서로 이루어진 전례 없는 연대였다. ‘연락을 받지 못했다’라는 사실은, 해당 작가의 물리적 소외가 아니라, 문학적 정세에 대한 감각의 부재를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참여하지 않았음에 대한 자책일 수 있겠지만, 서운함이 아닌, 왜 지금 그 목소리가 필요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했다. 그것은 누군가가 제외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거리를 두었던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문학은 언제나 중심에서가 아니라, 주변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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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점 테러는 현상이지 본질이 아닌 거
김 작가는 ‘성명에 참여하지 않은 작가’들이 온라인에서 비난받는 사례를 들어 “작가가 공격받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전체 성명의 의미와는 별개의 사안이다. 어떤 독자든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판단할 권리는 있다. 다만 그 행위가 불특정 다수의 린치로 비화할 경우, 이는 플랫폼과 커뮤니티의 통제 문제로 전환된다.
우리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비판은 가능하지만, 공격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414인의 성명을 무효화 하거나, 참여자에게 ‘문학적 우월성’을 요구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참여하지 않은 이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이해되지만, 그것이 곧 발언한 이들을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흐른다면 또 다른 억압의 문이 열린다.
🌍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이해
한강 작가는 당시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 적었다. 김 작가는 이를 무리수라 표현한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란 헌법이 지키고자 하는 생명, 자유, 평화의 근본 원리다. 작가가 그것을 언급했다고 해서, 어찌 그 진정성을 ‘너무 커서 무책임하다’라는 식으로 치환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 한 줄에 담긴 절제와 명료함은, 비난이 아닌 숙고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 문장은 누구를 겨냥한 것도, 무엇을 과장한 것도 아닌, 이 시대의 상식에 기대어 쓴 작가의 최선이었다. 우리는 그 말이 온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 소수의 권리와 권력의 면죄부
김 작가는 소수의 작가가 배제당한 현실을 지적하며, 이를 ‘문단의 구조적 문제’로 해석한다. 그러나 지금 ‘소수’의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소수 권력자의 헌정 유린 행위에 침묵하는 다수의 무책임이다. 소수의 권리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윤리와 공감의 문제이며, 특히 권력을 가진 자가 소수일 때, 그들의 권리는 더 엄격히 제한받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것은 단지 정치적 견해의 충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를 감지한 이들이 써 내려간 시대의 진술서다. 이 땅에서 펜을 드는 일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그것은 권력보다 약한 자의 얼굴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문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학은 지금 광장에서 시작되고 있다.
📌 결론: 작가와 침묵의 책임
김별아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지극히 사적인 존재”라고. 그러나 지금은 그 ‘사적 자유’가, 한 사회 전체의 ‘공적 책임’을 회피하는 명분이 되어선 안 되는 때다. 광장은 예술의 마지막 책상이었고, 이번 성명은 그 위에 문학이 다시 몸을 던진 순간이었다. 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의 아픔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말문을 트는 일이다.
때로는 그 말이 부족하거나 어설플 수 있어도, 그마저도 침묵보다 낫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자기 싸움에 몰두하는 작가가 아니라, 우리 시대가 직면한 전복과 파괴의 징후에 눈 감지 않는 작가다. 문학은 시대의 거울이자, 민주주의의 시계다. 그 시계가 지금, 진실을 직시하고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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