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서울의 봄>에서 2024년의 비상계엄을 마주하기

시대作 2025. 4. 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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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에서 2024년의 비상계엄을 마주하기

악의 권력은 언제나 자의적인 위기를 포장하며 등장한다

 

 

<서울의 봄>, 그리고 2024년 비상계엄
왜 우리는, 또 다른 장태완을 찾아야 했는가?


목차


그때 장태완은 있었지만, 지금은 왜 없는가

영화 <서울의 봄>은 그 위선의 서막을 생생히 재현한다. 1979년의 서울은 어둠보다 더 짙은 침묵에 잠겨 있었고, 총성은 명령에 앞서 복종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불복종을 선택한 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 전체를 다시 쓸 가능성이었다.

 

2025, 우리는 다시 비상계엄이라는 이름 아래, 과거를 불러오는 악몽을 목격했다. 다시 복종이 지배했고, 다시 침묵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번엔 장태완도 없었고, 그가 남긴 불응의 전통조차 잊힌 듯했다. 기억은 기록보다 강하다지만, 실천 없는 기억은 무기력하다. <서울의 봄>은 과거를 복기하되, 그것이 오늘을 예언하는 비극이 되지 않도록 경고한다.

장태완, 계엄군 저지

 

하나회에 맞선 ‘외로운 육탄’, 장태완의 위치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계엄군의 총구 앞에서 가장 강한 무기로 저항했다. ‘양심이었다. 그는 정치가 아니라 법 앞에 충성했고, 상부가 아니라 시민을 지켰다. 하나회라는 군 내부 사조직의 권력은 그에게 철저히 낯선 폭력이었다. 육사 출신이 아닌 갑종 장교, 그는 엘리트 네트워크의 바깥에서 예외를 실현했다. 그 예외는 순응을 배격하고, 헌법의 본질을 사수하는 군인정신의 모범이었다.

 

장태완이 선택한 길은 명령 불복종이 아니라, 불법 명령에 대한 헌법적 저항이었다. 그의 존재가 영화에서 빛나는 이유는, 단지 총을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끝까지 정신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군에서 그와 같은 인물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과거의 반성이 제대로 계승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그의 외로움은 당시의 특수성이 아니라 지금의 일반성에 의해 더욱 선명해진다.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한다우리는 여전히, 그의 불복종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인가?

 

2025년의 군대, 엘리트로 구조화된 맹종

오늘날 군은 과거보다 더 세련되었지만, 그 세련됨은 감정의 마비를 내포한다. 엘리트주의는 판단하지 않는 충성을 미덕으로 삼고, 인맥은 책임을 희석한다. 사관학교 중심의 폐쇄적 문화는 집단 사고를 강화하며, 다른 생각을 문제적 존재로 간주한다. 그 안에서 질문은 위험이 되고, 의심은 조직의 해악으로 여겨진다.

 

707특임단장은 국회가 왜 존중받아야 하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국가 원리에 대한 무관심이 빚어낸 참극이다. 지휘관들이 헌법을 모른 채 계엄령을 집행했다는 것은, 시민의 생명이 제도적 무지에 방기됐음을 의미한다. 복종이 곧 도피가 되고, 침묵이 곧 자기보존의 방식이 된 군대는 이미 위협이다. 군은 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군대는 시민의 안전보다 명령자의 안위를 먼저 고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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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나, 어떡하나…” 지휘관의 유약한 고백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은 헌법을 읽기 전에, 자신의 무능을 읽어야 했다. “어떡하나라는 말은 판단의 공백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지휘관이 불확실한 지시 앞에서 법적 검토 대신 분위기를 살폈다는 건, 통치가 아닌 방기의 행위다. 헌법을 부정하는 포고령을 읽고도 시간이 지나갔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간 안에 무너진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의 언어다.

 

지휘관의 책임은 위임된 힘이 아니라, 스스로 감당한 사유다. ‘처단한다.’ 이 선포 문장으로 시민을 위협하면서, 위헌 여부는 따져보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은 무책임을 미화할 뿐이다. 한 나라의 군 수뇌부가 어떡하나라는 말로 내란 기도를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위기에서도 안전할 수 없다. 이 고백은 양심의 발화가 아니라, 책임 회피의 언술이다. 군의 판단 오류는 곧바로 국가의 법치 파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유약함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이다.

 

왜 12‧12에는 시민의 저항이 없었는가

1212 군사반란 당시, 시민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감시와 억압의 구조 때문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언론은 입을 다물었고, 정보는 선택된 이들에게만 전달되었다. 저항할 수 없는 시대에 살았던 이들은 침묵 속에서만 저항할 수 있었다. 광주항쟁이 있기 전, 우리는 아직 광장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2025년의 시민은 모바일을 들고, 실시간으로 권력을 기록한다. 해시태그가 촛불을 대신하고, 익명이 연대의 또 다른 방식이 된다. MZ세대는 무정치를 가장한 직감의 정치를 실행한다그들은 공정, 상식, 연대를 감각적으로 탐지한다. 이제는 더 이상 시민이 몰라서저항하지 못하는 시대가 아니다. 단지, ‘늦게 알았을뿐이다.

 

계엄군

 

 

군의 정치 개입, 이대로 두어야 하는가

군이 정치를 돕는 순간, 정치는 곧 무장이 된다. 2025년 계엄 사태는 군의 내면에 남아 있던 권력 유혹의 실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지휘관들은 입을 모아 지시였다’, ‘몰랐다’, ‘피해자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명령도 헌법보다 위일 수 없고, 몰랐다는 항변이 죄를 지우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지키지 않은 군인은, 침묵 속에서 시민을 해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정치 개입의 유혹은 항상 국가의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그 포장은 늘 헌법의 숨을 조이고, 시민의 권리를 거세한다. 이제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우리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어떻게 실질화할 것인가? 군의 역할이 다시 정의되지 않는 한, 우리는 또 다른 계엄의 유령을 마주할 수 있다. 국가는 시민의 것이고, 총은 언제나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해야 한다.

 

 우리의 과제 ‘복종’ 아닌 ‘사유’의 군대

앞으로의 군은, 단지 강한 것이 아니라 깨어 있어야 한다.’ 명령에 대한 복종 이전에, 그 명령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사유하는 군인, 윤리적인 지휘관, 헌법을 내면화한 참모.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조건이다. 계엄령이 언제든 악용될 수 있다는 전례를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와 문화, 양심과 교육 모두를 바꿔야 한다. 시민 또한 군을 신뢰하되, 감시하는 시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장태완은 개인이 아니라, 구조와 양심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산물이 되기 위해선, 사회 전체가 그 가능성을 지지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한 명의 영웅을 기다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는 모두가 ‘작은 장태완’이 되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봄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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